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냐싱베 에야데마 (문단 편집) === 짧은 '[[로메]]의 봄' === [[1990년]] 10월부터 토고의 수도 [[로메]]에서 토고 역사상 최대의 반정부 시위가 열리자 에야데마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되는 새 헌법의 초안을 위한 제안을 승인했고, 1990년 12월 13일에는 토고 내 최초의 야당인 토고민주동맹(ADT)이 창립되었으나 아직 승인은 받지 않았으며,[* 사실 이전에도 토고에는 망명 야당이 민주주의를 위한 토고 운동(MTD)과 아프리카 민족 민주 협약(CDPA) 2개나 있었다.] [[1991년]] 1월에는 정치적 망명자들을 사면했다. 1991년 3월 1일~4월 30일에 로메에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시민들의 파업과 폭력 시위가 잇따랐고, 이에 군대는 시위대를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최루탄 투척, 실탄 발포를 통해 여러 명을 살해했다. 결국 1991년 4월 10일에 에야데마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압력으로 다당제로 전환했고, 1991년 5월에 에야데마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에야데마는 1967년부터 역임한 국방부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그리고 에야데마는 1991년 6월 12일에 국민회의 개최를 인정했는데, 7월 8일에 시작된 국민회의는 1991년 8월 27일에 조셉 코쿠 코피고(Joseph Kokou Koffigoh, 1948~)를 실권자 총리로 추대하고 에야데마는 형식적인 대통령으로 격하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코피고가 [[장면]], 에야데마가 [[윤보선]] 포지션이 된 셈이다.] 에야데마는 코피고를 총리로 추대할 때 국민회의를 군대로 에워싸며 반발했으나, 얼마 안 가 코피고의 총리 추대를 인정했다. 그러나 국민회의가 얼마 안 가 내부적으로 분열하고 코피고가 야당의 단결 대신 공기업 사장직에 자신의 지지자외 친구들을 임명하여 자신의 권력만 추구하는 등 정계가 혼란에 빠져들었다. 1991년 11월 26일에 코피고가 이끄는 과도 정부인 공화국 고등평의회(HCR)가 RPT를 금지하자 이에 반발한 군인들은 이틀 뒤에 코피고의 퇴진과 에야데마가 임명하는 새 총리 임명, HCR 해산과 모든 결정 무효화, RPT 합법화를 요구하며 코피고를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위협했고, 이에 굴복한 코피고는 '에야데마 지지자들을 정부에 포함시키겠다'고 말했다. 에야데마는 두려움에 떨며 프랑스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프랑스는 바로 하루 뒤인 11월 29일에 토고에 거주하던 3천 명의 프랑스인을 보호하기 위해 300명의 프랑스군을 이웃 국가인 [[베냉]]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1991년 12월 3일에 군인들이 그의 관저를 탱크와 기관총으로 포위한 후 최소 17명, 최대 200명이 사망한 군부의 유혈 쿠데타가 있었다.[* 참고로 사망자 중에는 대통령 경호 사령관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군부의 배후는 에야데마였고, 에야데마는 이를 통해 '코피고의 이전 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과도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12월 31일에 개각을 발표하며 다시 권력을 쥐게 되었고, 이렇게 토고의 짧은 민주화는 끝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